※디사이퍼(Decipher): 난해한 문장의 뜻을 판독하다. 암호를 해독하다.
한 철도회사를 둘러싼 경영권 분쟁이 있었다. 공격하는 주주들을 A, 수비하는 회사의 대표와 지배주주를 B라 하자. A는 여러 차례에 걸쳐 회사 주식을 매집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위협을 느낀 B는, A측이 회사 의사록과 장부를 손댈 수 없게 아예 공동묘지에 묻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작심한 A가 총과 각목으로 중무장한 용역깡패들을 동원, 역 하나를 무단 점거하고 열차를 탈취했다. 노선이라도 무력 점거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열차에 탄 A의 용역깡패들이 열차 노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다른 역들을 차례차례 점령해 나갔다.
B라고 가만있지 않았다. 자신이 고용한 용역깡패들을 반대편 열차에 태워 보냈고, 이 두 열차는 한 터널에서 정면 충돌한다. 결국 열차가 탈선하면서 두 열차에 탄 양 세력의 용역깡패들이 난투극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혈투는 군대가 출동할 때까지 3일간 이어졌다.
무슨 조폭 영화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미국에서 실제 벌어졌던 일이다. 때는 1869년, 뉴욕에서 24명의 주식중개인이 버튼우드 계약을 체결하면서 뉴욕 증권거래소의 시작을 알렸던 1792년으로부터 겨우 77년이 지난, 증권시장 초창기의 일이다. 이처럼 초기 증권시장은 불법과 폭력, 협박과 강취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이 때 총, 칼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며 부를 쌓았던 자본가를, 사람들은 ‘강도 남작(Robber Baron)’이라 불렀다. 그 당시의 미국 증권시장은, 무법자들이 활개를 치는 서부개척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강도 남작들이 장악했던 무법천지의 미국 증권시장은 대공황을 지나 1933년 연방증권법 제정을 통해 주식시장 질서의 초석을 이뤄냈다. 그 후 여러 차례 증권법 개정 및 제정을 통해 시장의 무질서와 부조리를 바로잡아 왔다.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미국 증권시장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선진시장으로 발전했고, 미국의 증권법은 전 세계의 증권법에 영향을 끼치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다른 국가들의 증권법의 모태가 됐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시장이 열렸을 때, 적절한 규제가 제때 도입되지 못해 발생하는 시장의 혼란을 두고, 규제 미비가 아닌 그 기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기술 자체가 태생적으로 사기이기 때문에 시장의 혼란이 발생하는 거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미국 증권시장 초기 혼란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욕망은 적절한 통제가 없는 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폭주할 수 밖에 없고, 시합에서 이기고자 하는 선수들의 열망을 통제하는 규칙이 없다면 그 경기는 아수라장이 될 수 밖에 없다.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은 적절한 규제를 적시에 도입하지 못한 대응의 미비지, 새로운 시장을 연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지금까지 가상자산 시장에서 벌어졌던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며 블록체인의 미래를 선구적으로 이끌어온 기업가·개발자도 많았지만, 적절한 규제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현혹해 시세조종과 내부자거래, 스캠코인, 다단계사기 등의 방법으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고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현대의 강도남작도 없지 않다.
정부가 투기열풍을 우려, 가상자산을 합법적인 자산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적절한 규제 도입을 주저하고 있는 사이, 가상자산 범죄로 인한 피해는 눈덩이처럼 계속 커지고 있다. 건전한 가상자산 생태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까지 위와 같은 범죄자로 매도 당하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마치,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선량한 개척민들이 무법자들에게 피해를 당하고 쫓겨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이러한 가상자산 시장의 서부시대를 끝낼 때가 됐다. 범죄 및 불법행위를 막아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시장이 올바르게 작동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 특정금융정보법 개정으로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규제는 일부 도입됐지만, 여전히 디지털자산기본법 등, 가상자산시장 자체를 위한 규제는 아직 논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한시바삐 필요한 규제를 도입, 앞으로 폭발할 디지털자산 시대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 3월 발표한 ‘디지털자산의 책임 있는 개발 보장에 대한 행정명령’에서, 디지털자산의 위험과 관련한 투자자 보호 및 불법행위에 대한 엄단을 천명하면서도, "미국이 디지털자산분야에서 기술상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국제적 논의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EU의회는 올해 6월 가상자산을 기존의 금융상품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내용의 가상자산법(Markets in Crypto - Assets: MiCA)에 합의했는데, 이 법안에 참여했던 스테판 베르게(Stephan Berger) 의원은 "무법적인 서부시대인 가상자산 시장에 질서를 부여하고, 가상자산 발행업체에 법적 지위를 제공하며, 소비자와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규제를 보장하는 명확한 규칙을 정했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미국이 디지털자산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면서 국제적인 논의를 주도하고, 유럽은 유럽 전체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가상자산법을 적용, 시장을 장악해 나갈 때, 우리나라가 이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디지털자산시장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본고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 IT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IT기업들과 스타트업을 대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 테크놀러지법 분야를 개척해온 변호사다.
현재 법무법인 디코드(D.CODE)의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